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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랜 친구와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습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그냥 소진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관계, 나한테 좋은 건가?' 최근 과학계는 이 막연한 느낌이 사실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데이터로 증명했습니다. 좋은 관계가 수명을 늘리고, 나쁜 관계가 노화를 앞당긴다는 이야기, 단순한 격언이 아닙니다.
독성관계, 기분 문제가 아니라 세포 문제입니다
솔직히 처음 이 연구를 접했을 때 조금 과장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2026년 초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실린 뉴욕대학교 연구팀의 논문인데, 요지는 이렇습니다. 주변에 '해슬러(Hassler)'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생물학적 노화 속도가 약 1.5%씩 빨라지고, 이는 달력 나이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약 9개월 더 높아지는 효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해슬러란 단순히 까다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일상적 비판, 무시, 배척, 적대적 태도 등으로 타인의 삶을 지속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인물을 뜻합니다. 문제는 이런 해슬러가 낯선 사람이 아니라 부모, 자녀, 오랜 친구, 직장 동료처럼 가까운 관계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연구 대상 2,300명 중 약 28.8%가 주변에 해슬러가 한 명 이상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몸에 어떻게 작용할까요. 연구팀이 활용한 측정 도구는 DNA 메틸화(DNA methylation) 기반의 후성유전학적(epigenetic) 생체시계입니다. 여기서 DNA 메틸화란 유전자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유전자 발현 방식을 바꾸는 화학적 변화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같은 유전자를 가졌더라도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에 따라 세포가 늙는 속도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이 연구에서 사용된 'DunedinPACE'와 'GrimAge2'는 단순 설문이 아닌 분자 수준에서 노화 속도를 정밀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해슬러와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은 신체의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자극합니다. 이때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코르티솔(Cortisol)이 핵심인데, 코르티솔이란 단기적으로는 위협에 대응하는 정상적인 스트레스 호르몬이지만, 만성적으로 높게 유지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체내 만성 염증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입니다. 이 염증 반응이 결국 세포 노화를 촉진한다는 것이 이번 연구의 핵심 메커니즘입니다.
- 해슬러 1명 증가 → 생물학적 노화 속도 약 1.5% 가속
- 전체 응답자의 28.8%가 주변에 해슬러 1명 이상 보고
- 가족 구성원이 해슬러일 경우 노화 촉진 효과가 비가족보다 더 두드러짐
- 만성 코르티솔 분비 → 면역 억제 → 만성 염증 → 세포 노화 가속
생물학적 노화, 노년에게 더 가혹한 이유
제가 직접 겪어보니, 나이가 들수록 싫어하는 사람의 리스트가 조용히 늘어납니다. 예전엔 무심히 넘겼던 사소한 행동 하나가 이제는 꽤 오래 마음에 걸리고, 친한 사람에게도 가끔 거리감을 느낍니다. 처음엔 그냥 예민해진 건가 싶었는데, 이게 어쩌면 몸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넬대학교 앤서니 옹(Anthony Ong) 교수 연구팀이 2025년 10월 학술지 『뇌, 행동, 면역(Brain, Behavior and Immunity)』에 발표한 연구를 보면, 생애 전반에 걸쳐 충분한 사회적 지지를 받은 사람들은 GrimAge와 DunedinPACE 두 가지 기준 모두에서 생물학적으로 더 젊은 상태를 유지했고 만성 염증 수치도 낮았습니다. 옹 교수는 이를 가리켜 "사회적 연결은 노후 대비 저축계좌와 같다"고 표현했는데(출처: PNAS), 일찍 시작할수록, 꾸준히 쌓을수록 이익이 커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관계가 많으면 다 좋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관계망의 규모가 크더라도 그 안에 해슬러가 다수 존재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됩니다. 관계의 양(量)보다 질(質)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도 재확인된 셈입니다.
한국의 시니어 세대는 이 맥락에서 특히 취약합니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응답한 노인이 전체의 6.6%였고, 85세 이상에서는 12.9%에 달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 독거노인의 우울 증상 비율(16.1%)은 노인 부부 가구(7.8%)의 두 배가 넘습니다.
더 서글픈 건, 오래된 관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로운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라고 부릅니다. 매몰 비용의 오류란 이미 투자한 시간과 감정이 아깝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이득이 없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심리적 편향을 말합니다. 수십 년 된 관계니까 소중할 것이라는 착각이, 실제로는 자신을 조용히 갉아먹는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저도 이 함정에 빠진 적이 있어서, 이 개념을 처음 알았을 때 꽤 찔렸습니다.
노년 인간관계, 정리보다 설계가 먼저입니다
"나쁜 관계를 당장 끊어라"는 처방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급격한 단절은 또 다른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특히 가족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리'보다 '설계'라는 표현이 더 맞는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실천해보니 효과가 있었던 방법은, 만남이 끝난 후 내 감정 상태를 짧게 기록해 두는 겁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로해졌는지,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같은 패턴이 나타나면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접촉 빈도를 서서히 줄이고 심리적 경계(psychological boundary)를 조금씩 두는 것만으로도 몸이 받는 만성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유의미한 차이가 생깁니다. 심리적 경계란 상대의 감정이나 행동에 무한정 반응하지 않고 내 정서적 공간을 지키는 내면의 선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긍정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역 문화센터, 시니어 동호회, 자원봉사 활동 등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기존의 부정적 관계를 심리적으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관계 공백을 좋은 관계로 채우면, 나쁜 관계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사회·정책적 차원도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한국 정부는 2025년 노인복지 예산을 24조 4,000억 원으로 확대하고 110만 개의 노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관계의 질'을 측정하고 개선하는 프로그램은 아직 미흡합니다. 텔로미어(telomere) 단축이나 염증 경로 같은 생물학적 노화 지표를 단순히 의료 영역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 돌봄 체계 안에 '관계 건강'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제도화하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텔로미어란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짧아지는 염색체 끝 부분으로, 이것이 짧아질수록 세포 노화가 빨라지는 생물학적 시계 역할을 합니다.
제 생각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좋은 음식을 먹거나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과 똑같은 건강 습관입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해슬러가 가족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관계를 끊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PNAS 연구에서도 가족 해슬러의 노화 촉진 효과가 비가족보다 더 크게 나타났는데, 이는 단절이 어렵고 노출 빈도가 높기 때문으로 봅니다. 접촉 빈도를 줄이고 심리적 경계를 두는 방식이 현실적이며, 가족 갈등 상담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Q. 나쁜 관계가 노화를 앞당긴다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가요?
A. 2026년 PNAS에 발표된 연구는 상관관계를 규명한 것으로, 완전한 인과관계 증명은 아닙니다. 연구팀 스스로도 이 한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DNA 메틸화 기반의 후성유전학적 생체시계를 활용해 분자 수준에서 측정했다는 점에서, 기존 설문 기반 연구보다 훨씬 정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Q. 노년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실제로 가능한가요?
A. 쉽지 않다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방식을 바꾸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대학 특수과정, 시니어 동호회, 자원봉사나 종교공동체처럼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이는 자리는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됩니다. 처음부터 깊은 친분을 기대하기보다 가볍게 자주 만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Q.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도 괜찮은 건가요, 외로운 건 나쁜 건가요?
A. 혼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고독을 스스로 선택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건 창조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원하지 않는데 고립되는 경우입니다. 사회적 고립과 부정적 관계 모두 건강에 해롭지만, 두 개념은 다릅니다. 작은 연결이라도 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결론
오랜 관계를 셈하고 구분하는 일이 서글프다는 생각, 저도 충분히 합니다. 그런데 지금 과학이 말하는 건 냉정한 인간관계 정리가 아닙니다. 내 세포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한 번쯤 진지하게 살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남이 끝난 후 가벼워지는 관계와 무거워지는 관계, 그 차이를 이제는 '기분' 문제가 아닌 '건강'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가 맺는 관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삶의 실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늙어갈수록 더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